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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설교에 있어서 경건의 필연성(강의요약)

목회자료이기희2012.04.18조회 1282

광신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고광필(Ph.D.)

서론

칼빈의 친구목사인 갈라스는 칼빈을 평가하여 탁월하고 경건한 목사였다고 말했다. 정말로 칼빈을 정확히 평가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목사는 학문이 있어야하고 경건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학문이란 단순히 박사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학교(성경)에서 성경의 진정한 내적인 선생님이신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성경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경건이란 그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하는 자가 경건한 자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온전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러야 한다.”(엡 4:12) 다시 말하면 말씀과 생활이 일치하는 자가 경건한 자이다.

그래서 칼빈에게는 학문과 경건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다. 어떻게? 경건한 학문으로 말이다.

칼빈은 신명기 설교에서 좋은 목사가 되려면 일급신학자가 되어야한다고 했다.

좋은 목사,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되려면 경건한 학문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처럼 목사가 신의 성품을 닮지 않고 어떻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젖 먹는 힘까지 동원하여 신의 성품을 닮도록 권면한다.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고 권면한다(벧후 1:4-8)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경건의 이르는 훈련을 강조했다.(딤전 4:7-8) 우리가 건강이 어려우면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해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목사로써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인 것을 알 때 경건에 힘쓰는 연습을 하게 된다.

 

칼빈은 28세에 목사안수 받고 그 후 28년에 거처 목사로서 설교했다.

주일에 세 번(오전 6시, 11시 3시) 설교 했고 주중에 월 수 금에는 구약을 가지고 격주로 어떤 때는 일주 내내 설교했다. 주일 오전 설교는 주로 신약을 가지고 했으며 오후에는 가끔 시편을 가지고 설교했다.

그 외에 칼빈을 주중에 신학강의를 두 번 금요일에는 목사들과의 성경공부인도(congregation), 병자방문, 편지 쓰기, 시의회참석, 방문자 접대를 비롯하여 칼빈은 정말로 일주일 내내 설교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강단에 원고 없이 원문 성경만 가지고 올라가서 설교했다.

그렇다고 해서 원고 없이 올라간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성경을 주석하고 신학강의를 했다.

그리고 아마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설교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일 년에 286편의 설교를 했으며 설교의 길이는 50-1시간 분량의 설교이다.

칼빈 생전에 4000편 이상의 설교를 했으나 소실되고 남아 있는 것은 2000 편이 남아 있다.

한국에도 상당한 분량이 출판되었다. 갈라디아서, 욥기, 에배소서, 디모데전서, 신명기, 창세기 이사야서, 시편, 예레미아서, 십계명설교, 미가서, 사무엘하 등이다. 칼빈은 그의 죽음 직전에 침상에서 누워서 자기의 어떤 저술보다 설교가 중요하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렇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는 이처럼 중요했다.

사실 하나님의 종에게 있어서 설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우리의 삶을 개혁하는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제네바를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개혁했다. 성공했는가? 칼빈의 제자 존 녹스의 말을 들어보자.

“이곳은, 감히 그리고 떳떳이 말할 수 있지만, 사도 시대 이후로 지상에서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학교들 가운데 가장 완벽한 곳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전파하지만 생활과 종교가 그처럼 진실하게 개혁된 곳을 나는 아직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칼빈 탄생 400주년 기념하여 제네바 피에르 성당에서 칼빈의 위대한 학자 중의 한사람인 에밀 드멜그는 기념 강좌에서 칼빈의 진정한 모습은 설교자로서 칼빈이며 그는 설교를 통해서 제네바를 개혁했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도 설교를 통해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

칼빈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고 회개시켜 삶이 변화시키는 그런 설교를 했다고 한다.

칼빈의 설교를 출판한 바디우스는 칼빈의 설교를 이렇게 평가했다.

“이 책을 다 마쳤을 때, 일찍이 이사야 52장 끝부분과 53장 전체에 관한 어떤 설교보다 뛰어난 설교를 우리가 듣게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고 생각했다.

그 설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의 비밀과 원인들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그려졌다.

그래서 마치 성령께서 우리 눈 앞에서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유죄판결을 받게 하고, 윌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것 같이 보인다... 이 설교들은 이 책의 다른 내용들과 매우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글로된 설교를 읽어보면 바디우스가 말한 만큼 감동을 주지 않는다.

설교란 문자화되면 설교 당시의 상황의 생생함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죽어버린다.

아무튼 칼빈의 설교는 청중을 사로잡고 삶의 개혁을 하게 하는데 충분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칼빈의 설교는 읽기에 쉽지는 않지만 깊고 무게가 있으며 감동력이 있다.

무엇이 칼빈의 설교를 그토록 무게있게 그리고 감동을 주고 회개하게 하는가?

그의 학문인가? 경건인가? 성령의 역사인가?

사실 칼빈의 설교는 학문도, 경건도 성령의 역사도 다 중요하다.

문제는 이것이 어떻게 결합되어 감동적인 설교를 구성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본 강의의 요지이다.

특별히 경건이 설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성령의 감화력은 학문에 비례한다기보다는 경건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칼빈에 의하면 경건은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아는데 필수적이다.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ubi nulla est religio nec peitas)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다고 칼빈은 말했다.

그렇다. 경건은 올바른 하나님의 지식을 갖기 위해서 설교자가 갖추어야할 필수조건이요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을 해석할 자격이 없으며 그런 사람의 성경해석은 한 마디로 추상적인 해석이다. 우리는 이점을 깊이 마음에 영접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경건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설교에 있어서도 필수적인 요소이다. 칼빈에게 경건이란 오늘의 영성처럼 신앙생활의 부분적인 요소가 아니라 신자생활의 총체이다.

경건은 하나님과의 신자의 관계성을 설정하는 개념이다, 가령 자식이 부모에 대한 효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설정하는 말이라고 한다면 경건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를 설정하는 말이다.

효도가 없는 자식은 불효자식인 것처럼 경건이 없는 신자는 목회자를 뭐라고 부를까?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자라고 할 수 있다. 효도가 없는 자식이 부모를 잘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경건이 없으면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

 

1.경건(pietas)의 정의

희랍 사람들에게는 신을 예배하는 것이 경건(ευσεβειαα)이라고 했다. 라틴 고전에서는 경건(pietas, pius)라는 언어는 자녀들과 부모들의 관계를 지칭하며 로마의 가문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이 경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로마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미덕은 경건이며 죄는 부모를 살인하는 죄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경건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 된 것”(reverence joined with love of God which the knowledge of his benefits induces) 이라고 했다. 이 정의는 성문사의 번역이다.

그리고 생명말씀사의 번역은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 정의는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 아주 중요하다. 한국어 번역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들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이라고 번역했는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경외심을 우러나오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사실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으며 경건을 일으킬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경외심을 일으켜서 우리로 하여금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게 한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경외심이 결합된 것(coniunctam cum amore Dei reverentiam)이다.

그러나 경건은 경외심과 사랑이 서로 결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결합된 경외심이다.

다시 말하면 경외심이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beneficiorum eius notitia conciliat)는 말이지 단순히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아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계시한 속죄의 사랑을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체험할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게 한다. 놀라운 칼빈의 통찰력이다.

정리하면, 첫째, 경건은 칼빈 이전의 학자들처럼 내 안에 있는 타고난 어떤 성향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둘째, 경건이 하나님의 은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경건을 일으킨다.

셋째, 경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일으키는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이다.

넷째, 경건은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성을 설정지우는 말이다.

칼빈은 자신 저술한 <칼빈의 신앙교육서>(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1537)에서 다음과 같이 경건에 대해서 정의한다. <기독교강요>에서 정의와 일맥상통하지만 <기독교강요>에서 말하지 않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 “진정한 경건의 요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꺼이 피하고 싶은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음으로 이 심판 앞에서 두렵고 떠는 마음과 태도에 있다.

오히려 참 경건이란 하나님을 주님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를 수용하고 죽을지언정 그의 마음을 거스리지 않은, 순수하고 참된 열심에 있다.

이러한 열심을 소유한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의 몰염치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날조하려는 시도를 그만두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구하되 하나님이 자기를 저들에게 계시하시고 선포하신대로만 이해한다.” 이 신앙 고백서에서 정의된 경건의 의미는 경건에 대한 단순한 정의가 아니라, 칼빈 자신이 직접 체험한 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칼빈은 그가 고백한 대로 일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칼빈의 신앙교육, 1537>를 통해서 몇 가지 경건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참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다.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둘째, 참 경건은 진실한 열정(sincero magis affectu)에 기초하고 있다. 신앙은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진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료된 믿음을 말한다.

셋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아버지라는 언어와 사랑이라는 언어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고 우리의 신앙의 여정에 항상 함께 하고, 인도하고, 지키고, 보호하는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또한 사랑이 없는 믿음은 지속성이 없으며 어려움이나 환난이나 기근이나 죽음을 이길 수 없다. 이러한 믿음이 경건한 믿음이며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다.

넷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는 하는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

이것이 경건의 최고 목적이다.

다섯째, 경건한 자는 하나님을 세상적인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성경이 계시하는 대로 알려고 하는 자들이다.

이점에서 경건과 해석이 연결되는 점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만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면 경건은 성경을 사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 된 대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 자세는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경건한 자세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지식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심을 갖게 하는 지식만이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며 이것은 우리의 교사이고 안내자인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식이다.

경건은 칼빈의 디모데 전서 4:8 주석에 의하면 기독교의 생활의 시작이요 중간이요 마지막이다.

이 말은 기독교는 경건의 종교이다. 경건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구분 짓는 잣대이다(신앙고백서).

다시 말하면 신자이냐 아니냐를 구분하고, 참 목사냐 아니냐를 구분 짓고, 기독교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잣대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건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2.경건의 비밀(딤전 3:16)

골 2:2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있다(골 2: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게 (unio mystica) 한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와서 우리의 지혜, 거룩, 구원, 의로움이 되신다(고전 1:31).

그리스도와 연합은 예수님과 신자의 친밀한 관계(너는 내 안에 나는 너 안에/ 접부침)이며, 이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아는 것이 경건의 비밀을 아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라 느끼는 개념이라고 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우리는 삶 속에서 체험해야한다.

 

3.경건의 목적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Soli Deo Gloria).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생활이다.

 

4.칼빈과 강해설교

칼빈의 설교를 강해 설교(lectio continua/연속적인 설교)라고 한다.

강해설교는 칼빈이 창안한 설교가 아니라 초대 교부들도 그렇게 설교했다고 한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오리겐으로부터 강해설교는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칼빈의 강해설교의 특징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설교의 종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 조유에는 대충 세 부류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제목설교(topical sermon), 둘째, 이야기 설교(narrative preaching), 셋째, 강해설교(expository sermon)이다.

제목설교는 그 나름대로 장점이 있지만 그 제목에 맞게 성경을 뚜드려 마추기 때문에 인위적이기 쉽다.

만약 제목설교를 하려고 하면 성경에서 제목을 찾는 것이 성경적인 설교이다.

둘째, 이아기 설교이다. 요즈음 인기리에 진행되고 있는 설교이다.

성경의 문학적인 장르 면에서 보면 성경은 대부분은 서사(story)이다. 그만큼 서사는 중요한 장르이다.

그러나 서사설교의 약점은 성경의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각색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게 되면 설교가 인위적이 된다. 그리고 신학적인 면에서 서사설교의 최대약점은 서사설교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자체(text)라기보다는 계시를 이해하는 계기(occasion/context)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중점을 둔다. 그렇다면 강해설교의 특성이 무엇인가?

칼빈의 설교를 보면 강해설교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는 것(to expose the Word of God) 이다.

설교는 설명이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이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내는 것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믿기 때문에 말하는 것, 즉 선포이다(고후 4:13).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실하게 믿지도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선포가 아니라 거짓 선포이다.

첫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입(the mouth of God)으로써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말씀의 대언자이다.

둘째, 고후2:17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서 장사하는 사람처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전하지 말고 하나님께 받아서 하나님 앞에서 선포하는 것이다.

설교를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심을 기자고 전해야 한다.

이것이 설교를 잘 하는 것이다.

셋째, 고후4:13처럼 믿기 때문에 말한다는 말처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실히 믿기 때문에 담대하게 설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말로 전하는 것이다.

 

5.경건과 성령의 감화력

성령의 감화력은 목회자의 경건에 비례한다. 칼빈에 의하면 성경해석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해석자의 학문, 경건, 기도를 사용하신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인간의 애씀(hominis opera/경건)을 쓰신다.

“오히려 절대적인 동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도구인 인간과 연합(cum hominis opera coniungitur)하시고, 성령의 능력(vis spiritus)을 인간의 노력에 더하여 주신다는 것이다(vis spiritus cum hominis opera coniungitur/conjungo/ 결합시키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인간이 그 자신의 능력으로 일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이루신다는 것이다.”고후 3:6 주석) 여기서 "성령의 능력"이라는 말은 성령의 감화력을 말한다.

예를 들면 딤전 4:7-8 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고 했다.

이 연단에 의해서 성령의 감화력이 결정 된다.

 

6. 경건과 수사학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이다. 설득하려면 명료성이 필요하다. 분명히 알지 못하고 어찌 설득하겠는가?

그러나 칼빈에서 수사학은 기독교 수사학이다. 그것은 성령의 능력을 들어내는 것이다.

여기서도 경건이 필수적이다.

성 어거스틴은 그의 설교학 교제라고 하는 <그리스도교양>이라는 책에서 수사학에서 중요시 하는 세 가지 설득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 가르침, 둘째, 매료시키는 것, 셋째, 설득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말했다. 설득력 있는 설교를 하려면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 때 감화력을 준다고 했다.

말씀과 일치하는 삶이 칼빈에게 있어서는 경건이다. 단순하지만 진리이다.

목회자들이 수사학을 배우기보다는 우리는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해야한다.

수사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감동적인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아니다.

필자는 지성과 영성이라는 이어령 교수의 책을 읽었다. 경건을 통해서 체험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듣는 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베풀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설교자의 경건을 쓰셔서 당신의 절대적인 능력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경건이 없는 지식 경건이 없는 설교 경건이 없는 강의, 신앙생활은 다 추상적이다.

누가 추상적인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겠는가?

 

7.정리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16 주석) 건강을 위한 육신의 운동은 약간 유익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감동적인 설교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훈련을 하라.”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실천해야한다. 이 말씀 하나님의 명령이고 목회자의 의무이다.

감화력 있는 설교를 위해서는 경건이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