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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중흥교회 100년사를 접하며
| ▲ 서방면 중흥리였던 이곳에 중흥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7년 6월 15일이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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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동을 찾았다. 광주의 중심가라면 중심가다. 주변이 서방이고 광주교대와 동강대학이 지척이다. 동부교육청을 위시한 북구청과 전남대학교도 가깝다. 중흥리였던 이곳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07년 6월 15일이다. 전라도 나주에서는 유생들에 의한 살해위협과 협박을 못이겨 나주선교부 설치가 실패로 끝나고 1908년에서야 서문정교회(현 나주교회)가 기적적인 창립을 하게 된 지 일 년 전 일이다. 1904년경 조선의 기독교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깡패들의 습격과 교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 성경을 뺏기고 집을 점령당하는 등 교인들은 줄지어 산으로 피신을 해야하는 지경이었다. 바로 전라도 장성에서 있어난 일이었다. 배유지 선교사가 1904년, 오웬 선교사가 같은 해 12월에 광주로 선교지를 옮겨왔다.
| ▲ 중흥 크리스천 문화카페 기동식을 2대 목사이며 원로목사인 박문제 목사와 현 담임목사인 김성원 목사와 당회원들과 함게했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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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겨울 12월 24일, 성탄절에 드렸던 예배후 6년만에 500명이라는 기적적인 성장을 맞이하는 광주교회로 성장했는데 1904년 이때가 바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가 동시에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1904년 기록을 보면 광주군 양림(楊林)교회, 영광군 신천리교회, 곡성군 옥과리교회, 나주군 덕림리교회, 완도군 관산리교회가 같은해로 표기되어 있어 표면적으로는 현재의 양림교회와 광주제일교회가 최초교회라는 논쟁의 불씨가 됐음도 주지해야 할이다.
광주중앙교회와 선의의 경쟁, 그리고 성장
| ▲ 총회를 앞둔 김성원 목사는 전남노회 전도부 주관의 2012년 부흥회가 담임하고 있는 중흥교회에서 열리고 있는터라 손님들 맞이에 바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을 냈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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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회 출범이후 1906년 충장로 3가 24번지 북문안교회가 탄생했으며, 1919년 북문안교회는 금정교회로 개명하였고, 1917년 1월 31일 광주중앙교회를 분립시켜 성장의 기반을 닦았다고 전해진다. 이때 이미 당시 광주군 우산리에 세워졌던 송정리 교회가 1901년, 목포 양동교회가 1898년, 나주군 삼도리 삼도교회가 1899년이고 보면 당시 호남복음화를 위해 숨가쁘게 복음의 행전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겠다.광주중흥교회는 1907년 창립이래 배유지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 변요한 선교사가 순회하며중흥교회를 이끈 지도자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56년이 지난 1963년 초대 위임목사로 유인식 목사가 등장하고 있다.
| ▲ 중흥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인 최국남 장로는 근 반세기(1907-1966) 동안 당회록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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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동안 중흥교회에서는 무슨일이 있었을까? 중흥교회 10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인 최국남 장로는 근 반세기(1907-1966) 동안 당회록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순회선교사와 전도사, 시무장로 등이 예배를 주관했으며 그간의 자료는 교회의 기록물과 노회록, 교단신문, 구전, 대담을 통한 채록을 기준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대 유인식 목사에 이은 2대 박문제 목사, 3대 김성원 목사에 이르기까지 광주 지방을 대표하는 중심교회로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아픔과 감동이 교회 곳곳에 스며있었다.
1대 유인식 목사, 2대 박문제 목사, 3대 김성원 목사
| ▲ 1대 유인식 목사에 이은 2대 박문제 목사, 3대 김성원 목사에 이르기까지 광주 지방을 대표하는 중심교회로 사명을 감당하기까지 아픔과 감동이 교회 곳곳에 스며있었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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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를 앞둔 김성원 목사는 전남노회 전도부 주관의 2012년 부흥회가 담임하고 있는 중흥교회에서 열리고 있는터라 손님들 맞이에 바빠 있었지만 잠시 시간을 냈다. 광주중흥교회는 한국교회 부흥의 큰 기초가 됐던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과 역사의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1897년부터 광주군 서방면 중흥리 전도처에서 성도들이 회집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음도 설명해주었다. 교회 부흥의 기초에 선진들의 숨은 기도와 눈물과 부르짖음이 초석이 됐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더욱이 중흥교회의 특징은 선교사나 외부인사의 도움이 아닌 당시 서방면 중흥리 일대에 살고 있었던 성도들의 자발적인 신앙과 헌신으로 되어진 일이기에 더욱 뜻이 깊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100년을 새로운 역사로,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회
| ▲ 1907년 설립한 중흥교회는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역사의 틀 속에 있다. 시대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온 것이다. 당회실에서 최국남 장로와 김성태 장로를 만났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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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설립한 중흥교회는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역사의 틀 속에 있다. 시대의 아픔과 나라 잃은 설움을 고스란히 간직한 체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거슬러온 것이다. 실로 민족의 암흑기요 절망의 구렁텅이 속을 기도와 부르짖음을 통해 극복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또한 중흥교회는 교단의 분열로 인한 아픔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국교회사 분열의 중심에서 교회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52년 10월 고신파의 분열, 53년 6월 10일 기장과의 분열, 59년 9월 24일 통합과의 분열, 79년 9월 20일 개혁과의 분열 속에서도 여전히 예장합동의 전통을 고수하면서 겪었을 내홍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 ▲ 3대 김성원 목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향후 100년을 바라보면서 중흥의 기치를 높이든 중흥교회가 지방교회의 선교와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고 돌아왔다. © 강경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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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들어 광주 중흥교회는 최대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조직폭력배들의 난동과 교회 주도권를 놓고 벌이는 비성경적, 비신앙적, 비합법적인 행동이 그것인데 바로 교회의 분열을 통한 교회의 좌초를 선동하는 세력들로 인한 아픔 속을 찬송과 기도로 헤쳐나오고 있음을 100년사를 통해 읽어볼 수 있었다. 참... 역사라는 것이... 눈물이 흐르는 한편의 감동이 묻어있다. 교회의 성장을 놓고 힘든 여정을 보내고 있는 교회들에게 순항을 향한 기도와 부르짖음의 원칙을 회복할 때 교회의 위기는 극복되는 것이라고... 3대 김성원 목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향후 100년을 바라보면서 중흥의 기치를 높이든 중흥교회가 지방교회의 선교와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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