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 껍데기를 벗겨내지 말라
한 시인은 ‘껍데기는 가라!’고 외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함성을 지르며 같이 외쳤다. ‘껍데기는 가라! 이제 알갱이들의 시대가 왔다. 더 이상 우리 알갱이를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말라’고... 껍데기는 죄인이 되었다. 껍데기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었다. 여기저기 벗겨진 껍데기들이 버려져 나뒹굴거나 짓밟혔다. 껍데기는 시체요, 쓰레기였다. 껍데기는 악이었고 쇠사슬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껍데기는 자신의 보잘것없는 모습을 부끄러워하면서 숨죽이며 살아가야 했다.
모든 알갱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설익은 알갱이들, 아직은 여린 알갱이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자유를 부르짖었다. 그러면서 알갱이들은 거친 세상살이에 부대껴 상처를 받았다. 세월이 흘러 가을이 왔지만, 껍데기들이 벗겨져버린 가을은 가을이 아니었다. 마르고 시들어버린 죽정이 뿐, 어디에도 튼실하고 알차게 익어간 열매는 없었다. 안타깝지만 우리들 한국의 가을마당은 그랬다.
껍데기는 벗겨내는 것이 아니다. 껍데기는 저절로 벗겨지는 것이다. 껍데기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껍데기는 온갖 비바람과 눈보라를 받으면서 알갱이를 지켜 간다. 짐승들이 헤치지 못하고 벌레가 먹지 못하도록 감싼다. 알갱이가 알차게 성숙할 때까지, 또는 그 알갱이에서 싹이 나고 튼실하게 자라기까지 보호하는 어머니요 아버지이다. 검버섯이 핀 주름살투성이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얼굴, 그것이 껍데기다.
껍데기는 화려하지 않다. 거칠고 딱딱하다. 세상을 향한 껍데기의 피부는 거칠지만 알갱이를 향한 속살은 한 없이 부드럽다. 껍데기는 겉으로는 냉정하지만 속으로는 한 없이 포근하다. 가슴에 고이 품은 그 작은 씨알, 그것이 자신의 전부요, 생명이라는 것을 안다. 그 생명이 벌레 먹고 썩어버리면 자신도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껍데기는 알갱이가 상처받지 않고 잘 자라도록 두텁게 감싸주기 위해서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껍데기는 자기의 운명을 세월에 맡기고 기다린다. 자신이 품고 있는 알갱이가 곱고 튼실하게 자라서 밝은 햇살에 반짝이는 날을 기다리며 산다. 알갱이가 껍데기를 찢고 고개를 내미는 날 찢겨지는 아픔은 오르가즘 같은 최고의 희열이 된다. 현명한 껍데기라면 자기 자신은 결국 썩어 알갱이를 위한 자양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알갱이를 위해 죽어간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희생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하면서 생리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너무 오랫동안 딱딱하게 감싸고만 있으면 알갱이는 숨이 막힌다. 알갱이는 팔과 다리 뻗을 수 없다. 알갱이는 고개를 내밀고 세상을 내다 볼 수도 없다. 가장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때를 알고 물러가는 것, 때에 맞춰 벗겨지는 것이야말로 껍데기의 본분이다. 알갱이가 익어 가면 벌어지는 밤송이를 보라. 얼마나 탐스러운가? 알갱이가 까맣게 익어 가면 스치는 바람결에도 터지는 봉숭아꽃씨 주머니를 보라. 얼마나 신비스러운가? 알갱이가 빨갛게 익어 가면 벌어지는 석류를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모든 껍데기는 아름다운 것이다.
모든 알갱이는 언젠가 껍데기가 되어 간다. 그것은 신이 정한 섭리요, 생명의 원리이다. 그러므로 껍데기 된 자 억울해 할 것도 없고 알갱이라고 껍데기보다 더 존귀하다고 뻐길 것도 없다. 신은 알갱이와 껍데기의 관계를 통해서 모든 생명들의 역할과 본분을 이루게 한다. 알갱이가 껍데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세상을 따뜻하고 아름답게 하며 모든 생명을 행복하게 한다.
그대 알갱이인가? 껍데기를 벗겨버리지 말고 기다리라. 그의 사랑을 감사하라. 그대 껍데기인가? 서러워하지 말고 알갱이가 차오르는 것을 기뻐하며 안간힘으로 버티려 하지 말라. 저녁노을처럼 사라지라. 그것이 그대의 행복이지 않는가?
(전남도민일보 2008년 4월 20일)